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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 이야기 I <민주주의가 태동하는 순간의 산고>

노마드홀릭_제이 2023. 8. 15. 21:56

 1937년 도쿄에서 태어났다. 가쿠슈인대학 문학부 철학과를 졸업한 뒤, 1963년 이탈리아로 건너가서 1968년까지 공식 교육기관에 적을 두지 않고 혼자서 르네상스와 로마 역사를 공부했다. 1968년『르네상스의 여인들』을 추오코론(中央公論)에 연재하면서 작가로 데뷔했다. 1970년부터 이탈리아에 정착하여 40여 년동안 고대 로마와 르네상스에 천착해왔으며, 기존의 관념을 파괴하는 도전적 역사 해석과 뛰어난 필력으로 수많은 독자를 사로잡았다.

이 책『그리스인 이야기』에서는 로마보다 더 이전에 서양 문명의 토대를 일군 위대했던 그리스를 본격 탐구함으로써, 역사 서술의 지평을 한층 심화. 확장한다. 그리스인은 왜 민주정치를 만들었으며 어떻게 발전시켰는지, 또 국가 위기 시 지도자는 어떤 리더십을 발휘했고 시민은 어떻게 민주주의를 지켜냈는지에 대해 특유의 흡인력 있는 문장과 풍성한 역사 지식으로 서술해나간다.

『대표작으로 로마인 이야기』 『십자군 이야기』 『체사레 보르자 혹은 우아한냉혹』 『바다의 도시 이야기』 『시오노 나나미 르네상스 저작집』 『로마 멸망 이후의 지중해 세계』 등이 있으며, 그 밖에 많은 작품을 펴냈다. 마이니치 출판문화상, 산토리 학예상, 기쿠치 간상, 신초 학예상, 시바 료타로상 등을 수상했고, 이탈리아 정부로부터 국가공로훈장을 받았으며, 일본에서 문화공로자로 선정되었다.


시오노 누님에 대한 평가는 우호적이지 않다. 역사가가 아닌 역사소설가인데 마치 소설을 역사처럼 오인하게끔 저술하여 이러한 오해를 만든게 아닌가 싶다. 물론, 그러하게 글을 썼노라라고 시원하게 말하지 않은 저자도 문제겠지만, 시오노 누님의 책을 읽는 우리 독자도 이러 부분에 대해서 소설과 역사의 경계를 인식하고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마치 삼국지와 삼국지연의를 구분하듯이.

시오노 누님의 역사이야기가 진실이든 아니든, 찬란했던 역사의 흥망성쇠를 통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반면교사 삼을 내용은 많이 있다고 생각한다 - 시오노 누님이 말하는 역사가 진실이냐 아니냐는 역사가에게 맡기고,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오늘의 나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를 고민하였으면 한다.

- 다시 말하지만, 우린 에세이를 읽는 것이지 역사책을 읽는 것은 아니다.

아래는 위키백과의 시오노 나나미에 대한 평가 일부이다. 참고로 읽어보면 도움이 될 내용이니 읽고 가도록 하자.

[위키백과]

많은 비평가역사학자들은, 시오노의 작품이 엄밀히 말하면 역사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많은 독자가 이를 사실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경계의 목소리를 낸 바 있다. 또한 시오노의 책에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 부분(《로마인 이야기》의 경우 특히 고대 그리스를 서술한 부분이나 로마의 속주 통치를 미화한 부분)이 다수 있으며, 이것이 독자들에게 잘못된 정보와 그릇된 편견을 심어줄 수 있다는 점을 지적받은 바 있다.

다른 비평가들은, 시오노의 저작 전반에 있어 그 주제의식과 문체가 지나치게 정치적으로 우경화되어 있으며, 이는 특히 청소년들에게 사상적으로 편향적인 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 특히 강대국의 제국주의와 작은정부를 지향하는 보수주의에 대한 옹호가 현저하다. 예를 들어 서울대학교 서양사학과 교수 주경철의 경우, 자신의 저서 《테이레시아스의 역사》의 pp.130~148에서 시오노 나나미를 "일본 우익 제국주의 성향을 온전히 가지고 있는 작가"이며,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향수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비판하였다. 책 곳곳에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일본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는것처럼 보이는 서술들이 상당수 있으며, 그리고 한일 양국의 역사문제에 관하여 "서로 각자 다른 버전의 역사교과서를 가지면 된다"고 역설, 일본측의 역사적 과오 반성이 필요없다고 주장하는 등, 역사의식에서 문제점을 보여주고 있다.

실제로 스스로 인정한 것과 같이 저작이 마키아벨리즘적이고, 권력에 대해 그다지 비판적이지 않은 문체를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상당부분 마키아벨리를 오해한 입장으로, 마키아벨리즘은 "도덕과 정치를 분리" 시키자는 것이지 "도덕 자체를 인정하지 말" 자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시오노 나나미의 입장을 "마키아벨리즘"으로 정의하는 것은 무리가 있으며, 시오노는 오히려 그 왜곡된 의미로서의 마키아벨리스트라고 할 수 있다.

 

민주주의을 태동시키는 '그리스인들의 행적' 이야기

민주정치와 그 정치체제 아래에서 지도자들의 능력 유무는 한 개인에게도 중요한 문제다. 개인의 노력으로 해결 가능한 문제가 있지만 국가가 나서지 않으면 해결되지 않는 문제도 존재한다. 그래서 저자가 선택한 것은 고대 그리스, 특히 아테네를 찾아가는 것이었다. 뭐라 해도 그리스인 그들은 민주정치의 창시자였다.

이런 이유로, 민주주의는 어떠해야 하는지, 민주정치 체제 아래에서 지도자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또한 유권자는 어떻게 관여해야 하는지에 관해서는 이 책에서 다루지 않는다.

그 대신에 이 책은 왜 그리스인은 그 전에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민주정치를 만들었고 언제 누가 어떻게 민주정치가 작동하게 만들었는지, 또한 국가가 존망 위기에 처했을 때 유권자는 어떻게 했으며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는지, 그 이후에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에 관해 다루고 있다.

서양문명의 원형, 민주주의 창시자 그리스인을 둘러싼 역사 에세이

그리스인 이야기 I 표지주인공 - 테미스토클레스

저자는 특유의 박진감 넘치는 문장으로 그리스인의 생각, 인생, 정치, 문화, 외교의 전모를 펼쳐낸다. 태초 신화에서 시작해 도시국가건설과 민주주의 실험, 그리고 국운을 건 1차~2차 페르시아 전쟁에 이르기까지 도도한 역사의 흐름 속으로 한달음에 빨려들게 만든다.

휘몰아치는 전쟁의 격랑과 그 저변에서 꿈틀거리는 민주정치의 태동과 발전, 이 두가지 축을 씨줄과 날줄로 절묘하게 교차시킴으로써, 저자는 그리스인이 꿈꾸고 실현해나간 세상을 손에 잡히듯 생생히 묘사해낸다.

인류 역사상 누구보다 먼저 세계화를 지향하면서 지정학적 결점을 장점으로 승화시킨 사람들, 지중해 패권을 장악하고 해양대국을 건설한 이 그리스인의 거대한 환타지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자.

<그리스인 이야기 I > 이해를 위한 역사적 배경과 지식

- 폴리스의 성립에서 페르시아 전쟁의 승리까지

폴리스의 성립

 

고대 그리스 폴리스 도시들

도리스인이 남하했을 때 미케네 문명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도리스인의 침략으로 일부 그리스 사람들은 에게 해의 섬과 소아시아 방면으로 이주하였다. 그리스인들이 이주한 소아시아 해안지대와 인접한 섬들을 이오니아라고 하였는데, 미케네 문화의 유산을 지키고 있던 이오니아는 오리엔트 문화와도 접촉하기 쉬워서 폴리스도 소아시아의 서쪽 해안에서 먼저 성립하였다.

기원전 8세기에 그리스는 암흑 시대에서 벗어나기 시작하였다. 미케네의 선형 B 문자가 잊혀진 이래 문자가 없었으나, 그리스는 페니키아 문자를 도입하고 이를 수정하여 그리스 문자를 만들었다. 기원전 9세기경부터 문자 기록이 등장하게 된다.

기원전 9세기 내지 8세기에 들어오자 그리스 사회는 점진적으로 안정되는 한편 철기의 사용에 따른 농업 기술의 발달로 인구가 급증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그리스에서는 토지의 부족 현상이 나타났고, 그 해결책으로서 이웃한 촌락의 토지를 정복하려는 위협이 대두하였다. 이러한 외부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하여 인근 촌락들은 결합하여 그 지역 내의 방어하기 좋은 구릉형 요새인 아크로폴리스에 모여 도시가 되었다. 또한 산맥들이 그리스 본토를 가로지르고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형성된 도시들이 모여 국가를 형성하기가 어려웠고, 도시들은 자체적으로 도시국가를 형성하게 된다. 이를 폴리스라고 한다.

미케네 사회가 붕괴된 뒤 그리스 본토에는 서너 부족으로 이루어진 소왕국이 여기저기 나타났으며, 현실적인 생활 단위는 개별 가족으로 구성된 촌락 공동체였다. 그리스의 지형 때문에 각 자치 공동체는 바다나 산맥에 따라 이웃과 단절되어 각 섬과 계곡, 평야에 각자 독자적인 취락을 이루었다. 정치는 왕정이었으나 임금의 권력은 미약하였으며 토지 소유에서도 미케네와 달리 공유지와 이에 따른 공동체적 규제가 없고, 촌락공동체의 성원은 저마다 클레로스(κλήρος, 분배지)를 소유하여 경제적 독립성이 강하였다. 도리스인이 남하하여 혼란이 일어난 데다, 다른 나라의 위협에서 스스로를 지키기 위하여 여러 촌락이 지리적ㆍ군사적으로 중심이 되는 곳에 모여들어 도시가 형성되었고, 그 도시를 중심으로 주변의 촌락들이 하나의 독립된 주권국가인 폴리스를 형성하였다는 집주설이 일반적으로 널리 통하고 있다. 대체로 그 시기는 호메로스 시대가 끝나는 기원전 800년을 전후한 시기로 보고 있다. 그러나 예외도 많다. 그렇기는 하나 여러 촌락의 중심시로의 집주로 폴리스가 성립한 게 전형이라 하겠으며, 따라서 이를 도시 국가라고 불러도 무방하다.

스파르타와 아테네

스파르타는 정복을 통해 성장하였다. 도리스인이 남하하였을 때, 원주민 가운데 스파르타의 지배를 받아들이고 종속적인 지위를 감수한 자는 운신은 자유롭되 시민권이 없는 페리오이코이가 되고 처음부터 예속신분이었거나 끝끝내 저항한 자는 헤일로타이라는 노예신분이 되었다.

기원전 8세기 중후반 스파르타에서는 전쟁을 일으켜 메세니아를 정복하고 주민을 농노(헤일로타이)로 삼았는데, 이러한 행위는 고대 그리스에서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스파르타의 예속 관습으로 반란의 위험이 생겼다. 스파르타 시민보다 훨씬 수가 많던 '헤일로타이'라는 이들 예속민은 스파르타를 위해 농사를 짓고 일하며 스파르타 시민과 국가가전쟁에 대비하였다. 상류층도 병사로 훈육받으며 살아야했으므로, 부자와 빈민이 모두 평등하여 시민의 결속을 강화할 수 있었다. 이러한 개혁은 기원전 9세기에 전설상의 뤼쿠르고스(Λυκοῦργος)가 제정하였다고 하나, 사실 메세니아 전쟁에 이르는 역사적 발전의 소산으로, 기원전 650년에 완료된 것으로 보인다.

스파르타의 국제는 두 사람의 왕이 있었으나 실권은 없고 두 왕을 포함하여 30명의 유명 가문 출신으로 구성되는 장로회가 국정의 중요 안건을 마련하지만 이는 20세 이상의 성년남자 시민전체로 구성되는 민회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국정운영의 실권은 집정관(Ἔφορος)이 가졌는데, 이들은 또 왕을 포함한 여러 관직자들의 행동을 감시하고 스파르타 특유의 생활양식의 준수 여부를 감시하였다.

이러한 스파르타의 정치구조는 왕정과 귀족정치의 영향을 받은 것이지만, 성년 남자 전원이 분배지를 가진 동등한 시민으로서 중장보병의 의무를 지고 있었기 때문에 민주정적인 성격도 있다. 완전한 시민권을 가진 시민은 전 주민의 5%~10%에 불과하였다. 그 이유로 언제나 헤일로타이의 반란을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러한 상황으로 스파르타는 쇄국주의․군국주의를 채택하였으며, 시민 생활을 전시체제처럼 조직하는 수밖에 없었다. 스파르타의 시민은 태어났을 때 심사를 거쳐 불구나 허약한 경우에는 남자뿐만 아니라 여자들도 버림을 받았다.

이러한 스파르타 시민에게는 개인적인 사생활이 없었고, 오직 훌륭한 전사가 되는 게 인생의 목적이었다. 일상용품의 생산과 상업도 페리오코이의 부담이었고, 화폐는 사용하기 불편하게 쇠로 되어 있었다. 자급자족을 원칙으로 삼아 대외 무역은 가급적 억제하였다.

아테네 귀족정치의 중심은 집정관(άρχων, 아르콘)과 아레이오파고스(Ἀρειόπαγος) 회의였다. 집정관은 처음 군사, 종교, 민사의 3명이었으나, 후에 9명으로 증가하고 임기가 끝나면 자동적으로 아레이오파고스 회의의 의원이 되었다. 아레이오파고스 회의는 부유한 명문출신의 귀족들로 구성되며 귀족 지배의 가장 핵심적인 기관이었다. 일반시민으로 구성되는 민회가 있고, 집정관도 여기서 선출되었으나 실질적인 권한은 없었다.

기원전 7세기 초에 상인 계급이 성장하였다. 상인 계급이 떠오르면서 여러 폴리스에서 긴장 상태가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각 폴리스를 지배하던 귀족 정권들은 새로이 부를 얻어 성장하여 정치적 권력을 얻고자 하던 상인들의 위협을 받았다. 기원전 7세기 후반 아테네는 토지ㆍ농업 위기를 겪어 내분에 빠졌다. 기원전 7세기 말 경 평민은 아테네는 귀족에 대해 도전하기 시작하였다. 기원전 621년 집정관 드라콘이 중벌주의에 따른 엄격한 개혁 입법을 내놓았으나, 분쟁을 잠재우지는 못하였다. 기원전 594년에 솔론은 사회․경제적 측면에서는 부채를 말소하고, 부채 때문에 노예가 된 자유민을 해방하였으며, 상공업을 장려하였다. 정치적으로는 시민을 재산 소유에 따라 4계층으로 구분하고 정치참여의 비중을 다르게 구분하였다. 그리고 새로이 각 부족으로부터 100명씩을 골라서 400인회를 만들어 민회에 제출할 안건을 만들게 했다. 이러한 솔론의 개혁은 종래의 귀족지배를 존속시키면서, 당면한 긴급한 문제를 우선 해결하고, 하층시민에게도 불완전하나마나 정치에 참여할 기회를 열어준 것이다. 이렇듯 온건한 개혁으로 솔론은 평민의 권리를 신장하면서도 귀족 정치를 지켜주어 아테네는 어느 정도 안정을 이루게 된다.

6세기 후반에 아테네는 참주 페이시스트라토스와 아들 히피아스와 히파르코스의 지배를 받았다. '참주'라는 말은 그리스어 '튀란노스'(τ?ραννο?, "적법하지 않은 통치자")에서 나온 말로, 원래 멸칭은 아니었으나, 선한 통치자건 악한 통치자건 모두에게 쓰였다.

아테네는 최초의 대외 전쟁인 살라미스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이 전쟁의 지도자였던 페이시스트라토스(Peisistratos)는 기원전 561년에 평민층의 지지를 바탕으로 참주가 되었다. 페이시스트라토스는 그에 반대하는 귀족을 추방하고 그 토지를 빈농에게 분배하고 상공업을 장려하고 은광을 개발하여 시민의 세금 부담을 감소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은 매우 과감한 것으로서 귀족세력을 크게 약화시켰다. 그러나 기원전 510년 아테네의 귀족 클레이스테네스의 선동으로 스파르타 임금 클레오메네스 1세가 아테네 사람들을 도와 참주를 전복시켰다. 그 뒤 클레오메네스 1세가 親스파르타파의 이사고라스를 집정관으로 세우자 두 나라는 서로 싸우게 되었다. 아테네는 스파르타의 괴뢰 국가가 되지 않도록 클레이스테네스는 아테네의 시민에게 모든 시민이 지위에 상관없이 정치적 권력을 공유하는 혁신을 제안하여, 아테네는 "민주주의" 국가가 되었다. 그리하여 이사고라스를 물리치고 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을 시행한 아테네 사람들은 스파르타가 이사고라스를 다시 세우고자 세 번에 걸쳐 감행한 침입을 물리칠 수 있었다. 민주주의가 등장하여 아테네의 병폐를 고쳤으며, 아테네의 '황금 시대'를 열었다.

아테네의 직접 민주주의 정착 과정은 다음과 같다. 솔론은 재산 정도에 따라 참정권을 부여하였다. 그는 시민 계층을 재산 정도에 따라 500석 급, 기사급, 농민급, 노동자급 등 네 가지로 분류했는데 계층에 따라 맡을 수 있는 공직의 지위는 달라졌다. 노동자급은 공직에는 참여할 수 없었지만, 시민 의회에는 참여할 수 있었다. 클레이스테네스는 정치 참여 자격에서 재산 기준을 폐지했고, 독재자의 추방을 막는 도편추방제(Ostracism)를 실시했다. 페리클레스는 시민 의회의 지위를 높이고, 투표에 참여하는 계층을 확대함으로써 민회 중심의 직접 민주주의를 정착시켰다. 또한 관리를 추첨으로 선발하고 수당을 지급함으로써 시민의 정치 권리 행사를 확대시키고, 가난한 시민도 정치에 참여할 수 있도록 했다.

제 1차 ~ 2차 그리스 페르시아 전쟁

제1차 그리스 페르시아 전쟁 마라톤 전투 전개도

페르시아의 제1차 그리스 침공(First Persian invasion of Greece)은 기원전 492년에 시작되었고, 기원전 490년에 마라톤 전투에서 아테네의 결정적인 승리로 끝났다. 두 차례 뚜렷한 회전이 있었던 내습은 아테네와 에레트리아와 같은 도시 국가를 징벌하기 위하여 아케메네스 제국의 황제 다리우스 1세가 친정을 하였다. 이 도시들은 페르시아 통치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던 이오니아 반란 도시들을 지원하여 다리우스의 분노를 샀던 것이었다. 다리우스 또한 유럽으로 제국을 확장하고 서부 변경을 확보할 수 있는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기원전 492년, 페르시아의 마르도니오스가 주도한 최초의 원정으로 트라키아를 정복하고, 마케도니아로 진군해 종속시킨 후 완전한 속국으로 만들었으나, 마르도니우스 함대가 아토스 산 해안 근처에서 난파를 당해 더 이상의 원정은 중단되었다. 이듬해, 의도를 증명한 다리오스는 그리스 전역에 특사를 파견하여 굴종을 요구했다. 특사를 참수한 아테네와 스파르타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두 그의 협박을 수용했다. 아테네는 여전히 도전적이었으며, 스파르타는 이제 사실상 그와의 전쟁에 임했다. 다리우스는 다음 해 추가 원정을 하겠다고 명령했다.

마라톤 전투에서 아테나이 - 플라타이아이 연합군을 이끌고 페르시아 군을 이겼다.

기원전 490년에 있었던 두 번째 페르시아 원정은 다티스와 아르타페르네스의 지휘 하에 있었다. 원정군은 처음에는 낙소스 섬을 함락시키고 불태웠다. 그리고 나서 키클라데스 제도의 다른 섬들을 차례로 페르시아 제국으로 편입시켰다. 그리스에 도착했을 때 에레트리아에 상륙을 했는데 잠시 포위를 하여 함락시키고 시민들은 노예로 삼았다. 마지막으로, 원정군이 아테네로 향하는 도중에 아티카를 경유하기 위해 마라톤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소규모 아테네 군대 밖에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테네군은 마라톤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 결정적인 패배로 인해 페르시아의 원정은 성공을 거두지 못했고, 원정군은 아시아로 돌아가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원정군은 낙소스와 에레트리아를 징벌한다는 대부분을 목적을 달성하였고, 마케도니아 전역을 포함한 에게 해 대부분의 지역을 가져올 수 있었다. 이 원정에서 미완으로 남은 과업은 다리우스로 하여금 그리스의 완전정복과 아테네, 스파르타의 징벌을 위한 훨씬 더 큰 규모의 그리스 침공을 준비하게 했다. 그러나 제국 내의 패권 다툼으로 인해 이 원정은 지연되었고, 다리우스는 노환으로 사망했다. 그리하여 기원전 480년에 시작되는 제2차 페르시아 침공은 그의 아들인 크세르크세스 1세의 몫이 되었다.

제 2차 그리스 페르시아 전쟁 전개도

페르시아의 제2차 그리스 침공(Second Persian invasion of Greece) 기원전 480년에 크세르크세스는 몸소 원정길에 나서 터무니없이 거대한 군대를 이끌고 두 번째로 그리스를 침공하였다. 페르시아는 유명한 테르모퓔라이 전투에서 (스파르타와 아테나이가 주도한) 그리스 연합군을 무찔러 그리스 대부분의 지역을 장악하였으나, 연합군 함대를 파괴하려다 페르시아는 살라미스 해전에서 대패하였다. 이듬해 헬라스 연합군은 반격에 나서 플라타이아이 전투에서 페르시아군을 격퇴하고 그리스 침략을 막아내었다.

헬라스 사람들은 여세를 몰아 소스테스(기원전 479년)과 뷔잔티온(기원전 478년)의 페르시아 주둔군을 몰아내고 미칼레 전투에서 남은 페르시아 함대를 격침하였다. 뷔잔티온 공성전에서 파우사니아스 장군의 행동으로 여러 그리스 국가가 스파르타를 멀리하게 되었으며, 反페르시아 연합은 아테네가 주도하는 델로스 동맹으로 재조직되었다. 델로스 동맹은 이후 30년간 페르시아에 대항한 전쟁을 계속하여 유럽에 남은 페르시아 주둔군을 몰아냈다. 기원전 466년 에우리메돈 전투에서 델로스 동맹은 두 번의 승리를 거두어 결국 이오니아 도시들의 독립을 쟁취하였다. 그러나 이집트에서 일어난 반란(기원전 460년~454년)을 지원하려고 델로스 동맹이 개입하다가 크게 패하고 원정을 중단하였다. 기원전 451년에는 퀴프로스에 함대가 파견되었으나 별 소득을 얻지 못하고 철수하면서 그리스와 페르시아의 전쟁은 조용하게 끝나버렸다. 어떤 사료에서는 전쟁 상태가 종료된 것이 아테네와 페르시아간의 소위 〈칼리아스 조약〉이라는 평화 협정에 따라 이루어졌다고 하기도 한다.

영화 300의 배경인 테르모필레 전투

테르모필레 전투(고대 그리스어: Μάχη τῶν Θερμοπυλῶν, Battle of Thermopylae)는 페르시아가 두 번째로 그리스를 침공할 당시 사흘 넘게 벌어진 전투이다. 이 전투는 테르모필레("뜨거운 문")에서 기원전 480년 8월 또는 9월에 아르테미시온 해전과 동시에 일어났다. 이 전투에서 스파르타가 이끄는 그리스 도시국가 연합군과 크세르크세스 1세의 페르시아 제국이 맞붙었다. 제1차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에서 아테네가 마라톤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패배한 페르시아는 뒤늦게 앙갚음을 하고자 다시 그리스를 침공하였다.

크세르크세스는 거대한 육해군을 거느리고 그리스 전체를 정복하고자 하였다. 아테네 장군 테미스토클레스는 그리스 연합군이 테르모필레 고개에서 페르시아 육군의 진입을 막고, 동시에 아르테미시온 해협에서 페르시아 함대를 막자고 제안하였다.

그리하여 병력 7,000여 명의 그리스 연합군은 기원전 480년 여름에 북쪽으로 행군하여 고갯길을 봉쇄하였다. 고대 사료에서는 백만 명으로 짐작하였던 페르시아 군대는 8월 말 또는 9월 초에 고개에 다다랐다. 병력면에서 압도적인 열세였던 그리스 군대는 역사상 유명한 일전에서 후위대가 궤멸되기 전까지 총 이레 동안(그 중 사흘간은 전투)이나 페르시아군을 막았다.

페르시아의 아르타바누스가 이끄는 1만 명의 선발대를 포함해 스파르타 왕 레오니다스 1세가 이끄는 소규모 군대가 페르시아의 거대한 군대가 지나갈 길 한곳을 막으며 이틀 꼬박 전투가 벌어졌다.

이틀째 전투가 지나고 에피알테스라는 지역 주민이 그리스인을 배신하고 그리스 전열 뒤로 이어지는 작은 샛길을 누설하였다. 포위당했음을 알게 된 레오니다스 왕은 그리스 군대의 진열을 해체하고 후방을 지키기 위하여 스파르타인 300명, 테스피아이인 700명, 테바이인 400명 그리고 여타 몇백명을 배치하였는데, 이들 대부분이 전사하였다.

일전이 끝나고 아르테미시온의 연합군은 테르모필레의 비보를 들었다. 당초 그리스의 전략은 테르모필레와 아르테미시온 양쪽에서 적을 막는 것이었으므로, 육지에서 길을 내어준 이상 그리스 함대는 살라미스로 퇴각하기로 하였다.

페르시아인들은 보이오티아로 쇄도하였고, 당시 사람들이 피난을 떠나고 텅 빈 아테네를 점령하였다. 그러나 페르시아 함대에 결정적인 일격을 노리던 그리스 연합군 함대는 기원전 480년 말 살라미스 해전에서 침략군을 격퇴하였다. 그리스에서 발이 묶일 것을 두려워한 크세르크세스는 군대 대부분을 페르시아로 철수시켰으며, 마르도니오스에게 그리스 정복을 완수하도록 맡겼다. 그러나 이듬해 플라타이아이 전투에서 그리스 연합군은 페르시아인을 무찔렀으며, 이로써 페르시아의 침략은 종식되었다.

고대와 현대 저자 모두 테르모필레 전투를 일컬어 조국 땅을 지키려는 애국적인 자유민 군대의 위력을 보여주는 예로 삼는다. 또 이 전투는 훈련, 장비, 지형의 이점을 살려 전력 증강을 꾀한 사례로 꼽히며, 압도적인 적에 맞서는 용기의 상징이 되었다.

살라미스 해전

그리스의 삼단 갤리선

테미스토클레스의 속임수로 페르시아 함대는 살라미스 해협에 진입하여 두 입구를 막으려 하였다. 그러나 해협이 너무 비좁았기 때문에 페르시아의 군함들이 이동하려 하면서 흩어져버려 오히려 이들의 수적 우세는 장애가 되어버렸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리스 함대는 전열을 이루어 페르시아에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으며, 최소한 200여척이 넘는 페르시아 함선이 침몰하거나 나포되었다.

그리하여 크세르크세스는 군대 대부분을 이끌고 아시아로 물러나고, 마르도니오스만 남겨 그리스 정복을 완수하게끔 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그리스에 남은 페르시아군은 플라타이아이 전투에서 격퇴당하고, 미칼레 전투에서 페르시아 해군이 무너졌다. 그 뒤 페르시아는 더이상 그리스 본토를 정복할 시도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살라미스 해전과 플라타이아이 전투는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의 전환점이었으며, 이때부터 그리스의 폴리스 연합은 반격에 나섰다. 여러 역사가들은 페르시아에 대한 승리가 고대 그리스를 발전케하였으며, 그 자체로 '서구 문명'을 확대하여 살리미스 해전을 인류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전투로 주장하게 되었다.

플라타이아이 전투 전개도

살라미스 해전으로 페르시아 군은 큰 손해를 입었지만, 여전히 전쟁을 계속할 충분한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살라미스에서의 대패에 실망한 크세르크세스 1세는 장군 마르도니오스(다리우스 1세의 사위)에게 페르시아 육군 30만명의 총 지휘권을 맡기고 귀국해 버렸다. 마르도니오스는 그 해는 일단 테살리아 지방으로 후퇴했고, 군량 수확을 마친 이듬해 기원전 479년에 다시 그리스 정복을 시작했다. 아테네는 다시 살라미스로 소개했고, 페르시아 군은 아티카로 진군하여 이 땅을 정복했다. 아테네는 그리스 각지에 구원을 요청했고, 페르시아와 육상 결전을 호소했다.

물론 스파르타도 아테네의 구원 요청을 받았지만, 당시 스파르타의 지휘권을 쥐고 있던 왕족 파우사니아스는 아테네에 원군을 보낼지 고민하고 있었다. 스파르타 국내의 많은 노예들이 페르시아 전쟁을 틈타 불온한 기운을 풍기고 있었기 때문에, 원정에서 노예 반란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파우사니아스는 신탁을 받아 신들에게 그 결정을 맡기기로 했다. 그 때의 신탁은 ‘레오니다스의 원수를 갚아라’라는 것이었다. 이를 들은 파우사니아스는 원군을 보내기로 결심하고, 휘하의 스파르타 군과 함께 아테네로 원정을 떠났다.

페르시아 장군 마르도니오스는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1세를 통해 대피하는 아테네 사람들에게 평화협상을 신청했지만 거부당했다. 그리스 연합군은 당초 아티카 지방의 트리야 평원에서 결전을 벌일 예정이었지만, 페르시아 군이 아테네를 파괴한다고 테바이에 있는 보이오티아 지방으로 후퇴했기 때문에 그리스 연합군은 이를 쫓는 형태가 되었다. 파우사니아스 휘하의 스파르타 군은 코린트 부근에서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여러 폴리스 군을 기다렸고, 곧 엘레프시나에서 아테네군과 합류했다. 그리스 연합군은 이곳에서 북상하는 페르시아 군의 기병을 경계하며, 키타이론 산 기슭에 포진하여 페르시아군과 대치했다.

그리스 연합군이 키타이론 산록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마르도니오스는 기병의 전개 할 수 있는 평원까지 그들을 끌어내고, 도발을 하기 위해 기병대를 보냈다. 마르도니오스의 명령을 받은 마시스티오스가 이끄는 기병대는 페르시아 선발대로 그리스 군에게 돌격하여 피해를 입혔다. 이 공격에 노출된 메가라군은 구원을 청했고, 아테네의 정예 부대는 궁병을 데리고 급히 가서 먼저 사령관 마시스티오스를 죽였다. 페르시아 기병은 그의 시체를 회수하기 위해 그리스 군을 향해 돌격을 반복했지만, 그리스는 증원을 통해 돌격을 막아냈다. 결국 그들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마르도니오스의 진영으로 철수했다. 이것으로 사기가 올라간 그리스 연합군은 플라타이아이로 내려왔다.

양군은 그대로 10일간 대치를 하였지만, 11일째에 마르도니오스가 기병대 돌격을 지시했고, 그리스의 급수지인 가라피아의 샘을 유린하고 물과 보급로를 위협하자 그리스인은 한밤중에 후퇴를 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였다. 그러나 스파르타 군은 “밤에 철수하는 것은 도망치는 것과 같은 불명예스러운 짓”이라며 후퇴를 거부했고, 결국 스파르타가 후퇴하기 시작한 것은 해가 뜬 후였다. 좌익에 포진한 스파르타 군의 고립을 우려한 아테네군과 메가라군이 여전히 플라타이아이에 포진하고 있었지만, 중앙의 다른 폴리스군은 후퇴를 해버렸기 때문에 전장은 우익의 스파르타와 테게아, 좌익의 아테네와 메가라만이 있었다.

스파르타 군의 철수를 본 마르도니오스는 적이 두려워서 도망간다고 착각하고, 전군에 추격 명령을 내렸다. 이렇게 플라타이아이 전투의 막이 올랐고, 플라타이아 전투 결과는 스파르타와 아테네군의 압승이었다. 이 전투에서 페르시아군은 20만명 이상이 전사했다. 한편, 스파르타군의 전사자는 91명, 아테네군은 52명뿐이었다고 한다. 플루타르코스는 그리스 측도 1000명 정도의 전사자가 나왔다고 밝히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큰 승리임에는 변함이 없다. 스파르타 군은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전사한 레오니다스의 복수를 완수할 수 있었다.

이후, 테바이는 그리스 연합군에게 공략되고, 그리스 본토에서 페르시아 세력은 전멸당했다. 이 패전으로 페르시아의 그리스 본토의 침략은 실패로 끝났고, 실패한 〈이오니아 반란〉으로 페르시아에 종속되어 있던 이오니아 등 여러 도시의 독립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민주주의는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현실의 필요로부터 탄생하였다.

<그리스인 이야기 I> 서두에서 시오노 나나미는 당시 그리스인이 훗날 서양의 패자가 되는 로마인을 거들떠보지 않았다고, 아예 상대로 여기지조차 않았다고 말한다. 그 정도로 고대 서방 세계의 대표주자는 그리스와 그리스인이었다. 그리고 그 반대쪽 동방 세계에는 페르시아라는 대제국이 강대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위세를 떨치고 있었다.

사실 그리스는 상당히 결점이 많은 나라였다. 국토가 주로 바위투성이 산악지대여서 자체 생산력이 떨어졌다. 게다가 그리스는 한 나라가 아니었다. 무수히 많은 크고 작은 도시국가들 폴리스들이 난립한 형태였다. 게다가 도시국가들끼리 서로 끊임없이 전쟁을 벌였다. 고대올림픽이 이 지난한 전쟁을 잠시나마 멈추기 위해 탄생했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이런 그리스가 어떻게 서양 문명, 나아가 현대 문명의 한 모태로까지 성장하게 되었는지, 그 과정을 따라가는 여정은 무척이나 흥미진진하고 신선하다. 이 책에서 시오노 나나미는 당시 그리스에서 민주정치가 싹트고 발전해간 까닭을 ‘필요성에 대한 인식’이라고 단언한다. 당시 민주주의는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현실’이 요구하는 ‘필요’에 따른 조치였다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들 중 최강국은 아테네와 스파르타였고, 코린토스와 테베가 그 뒤를 이었다. 군사력에서는 스파르타가 가장 막강했지만, 국가체제에서는 스파르타가 소수 지배였던 반면 아테네는 민주정치를 지향했다. 이에 따라 그리스 민주주의는 아테네를 중심으로 발전한다. 그러나 그것은 단숨에 이루어진 것도, 순탄하게만 이루어진 것도 아니었다.

아테네의 개혁은 귀족정치를 타파한 솔론의 금권정치를 시작으로 해서,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참주정치, 클레이스테네스의 실력주의, 테미스토클레스의 전시 위기관리 체제, 그리고 이후 아테네 민주정치의 황금기를 이끈 페리클레스 시대로 이어진다. 이들 각각은 당연히 그 자체로 완벽하거나 방향이 올바르지만은 않았다. 따라서 어떤 면에서는 독재와 비민주의 요소가 표출되기도 했다. 다만 그 근간만은 결코 흔들림이 없었다. 각 단계마다 ‘계급 간 갈등 해소’ ‘체제 안정’ ‘경제력 향상’ ‘국난 극복’ 등 다양한 현실의 요구, 즉 ‘필요’가 존재했고, 이에 발맞추어 나름의 색깔을 더하며 아테네 민주주의는 발전을 거듭해나갔다. 그런 점에서 시오노 나나미의 다음과 같은 진단은 의미심장하다.

“아테네의 민주정치는 고매한 이데올로기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다. 필요성 때문에 태어났다. 냉철한 선택의 결과다. 냉철하고 필요성을 느끼는 사람이 지배하던 시대의 아테네에서 민주주의는 힘을 가지게 되었고 작동했던 것이다. 민주정치가 이데올로기로 변한 시대에 도시국가 아테네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쇠퇴뿐이었다.”

‘양’의 열세를 ‘질’의 우수성과 ‘활용’의 힘으로 극복하다

민주정치의 확립과 더불어 그리스가 맞닥뜨린 또 하나의 큰 과제는 국난 극복이었다. 바로 제1차, 제2차 페르시아전쟁이 그것이다. 아케메네스왕조 페르시아는 키루스 대왕의 정복 전쟁을 시작으로 중동에서 북아프리카를 아우르는 대제국으로 성장한다. 그리고 다리우스 1세에 이르러서는 ‘왕 중의 왕’을 자처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나라가 되었다. 자타공인 당대 최강 군사력을 보유한 다리우스는 마침내 그리스에까지 정복의 손길을 뻗친다.

당시 그리스의 군사력은 페르시아의 군사력에 턱없이 못 미쳤다. 누가 봐도 패배는 명약관화했다. 더욱이 그리스는 여러 도시국가들의 연합체였다. 일체감이 부족하고 구심점이 부실할 수밖에 없었다. 이 불리한 전황을 극적으로 타개해낸 인물이 바로 아테네 지도자 테미스토클레스였다.

페르시아전쟁 기간 동안 테미스토클레스의 활약은 그야말로 눈부셨다. 마라톤전투, 테르모필레전투, 아르테미시온해전, 살라미스해전, 플라타이아전투, 미칼레 공략 작전 등 주요 전투가 이어지는 가운데 테미스토클레스는 탁월한 전략과 위기관리 능력, 강력한 리더십으로 끝내 페르시아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를 두고 저자가 “아테네 민주정치가 낳은 아이” “아테네 최고의 유명인일 뿐 아니라 그리스 최고의 유명인”이라고 한 것은 빈말이 아니다. 심지어 역사가 투키디데스는 “테미스토클레스의 존재 자체가 감탄할 수밖에 없는 경이로움”이라고 극찬한다.

그런데 한 개인으로서 영웅이 아니라 그리스 전체를 놓고 볼 때, 그리스가 대제국 페르시아를 물리칠 수 있었던 요인은 무엇이었을까? 시오노 나나미는 그것을 ‘질’, 다시 말해 ‘활용하는 능력’이라고 지적한다. “페르시아(동방)는 ‘양’으로 압도하는 방법으로 공격해 왔다. 그리스(서방)는 ‘질’로 맞서 싸웠다. 이때 ‘질’이란 개개인의 소질보다는 모든 시민이 지닌 자질을 활용한 종합적인 질을 의미한다. 즉 한데 모아서 활용하는 능력이라고 말해도 좋다. 이를 통해 그리스는 승리했다. 보리 한 줌에 불과했지만 대제국을 상대로 이긴 것이다.”

이때 ‘활용하는 능력’이란 ‘응용력’ ‘융통성’ ‘목적 지향성’ 등으로 읽힌다. 일례로 저자는 테미스토클레스를 “누구든 활용하려 했고”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은” 인물로 묘사한다. 실제로 테미스토클레스는 참주(독재자)의 등장을 막기 위해 도입한 민주적 수단인 도편추방 제도를 정적 제거에 ‘활용’했으며, 나아가 전쟁에서 승리라는 목적을 위해 제거한 정적을 다시 불러들여 ‘활용’했다.

그리스인들은 페르시아전쟁이라는 엄청난 위기를 극복하고 승리함으로써 자신들이 가진 자질에 눈을 떴고, 이는 이후 유럽 정신을 이루는 중요한 한 요소로 자리매김했다. 오늘날 유럽은, 고대 그리스인이 페르시아로 대표되는 동방과 차이를 만들었던 바로 그때, 비로소 시작되었던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